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타타르의 멍에 (문단 편집) === 정치 분야 === >모스크바의 몽골의 정치적 제도에 대한 차용은 광범위했지만 여전히 선택적이었다. 모스크바는 몽골의 인구 조사를 차용한 적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행정적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일 것이다. (...) 몽골의 권력이 마침내 무너진 후 나타난 모스크바 전제정은 몽골의 지배를 모방한 것도, 대응한 것도 아니었다. >---- > Charles J. Halperin., The Tatar Yoke: The Image Of The Mongols In Medieval Russia. "몽골의 지배로 인해 러시아에 억압적이고 후진적인 체제가 완성되었다", "몽골 지배로 유럽과 단절되었다"는 건 상당히 유서 깊은 편견 중 하나다. "'''러시아는 유럽인가 아니면 아시아인가'''"라는 유서깊은 질문 관련하여 러시아 측은 "자국은 분명히 유럽의 일원이며 자국 내 여러 문제는 '야만스런 몽골'의 압제가 남긴 유산"이라고 변명한다면, 러시아를 적대하던 유럽 민족들은 이 몽골-타타르의 멍에를 근거로 "러시아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유럽인이 아니라 '몽골 야만인'의 혼종"이라는 식으로 비하하는 레퍼토리로 활용된다. ~~중세시대 세계의 정복자에서 근현대 들어서 동네북으로 전락한 몽골~~ 대표적으로 러시아의 [[농노제]]가 얼마만큼 몽골-타타르의 멍에에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논의가 있다. 그러나 이건 전형적인 선입견인데다가 '''주제에서 벗어난 논의다'''. 애시당초 농노제나 그와 유사한 제도들은 몽골과 상관없이 전세계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농노제는 오랜 세월 동안 계약과 관습이 쌓이는 변화하는 과정 중의 한 순간을 의미하지 국가적 제도가 아니다. 노예제, 농노제, 노비제든 어떤 형식이든 이러한 예속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전근대의 국가나 군주가 만들어내거나 폐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전제정을 추구하는 한 봉건제의 부수물인 농노제와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귀족에게 속해 있는 농노에게서는 세금을 걷지 못하고 이는 귀족권의 강화와 중앙정부의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에 대한 귀족들의 착취가 커질수록 왕권은 그것을 완화하려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왕과 귀족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수제브니크를 비롯한 루스 차르국의 법은 최대한 농민의 권리(정확히는 농민공동체)를 보호했다. [[이반 4세]]만 봐도 수도원에 칩거한 후 귀족과 부자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호소하여 지지를 얻어 다시 권력을 찾을 수 있고 농민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일종의 '의회'에 해당되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했다. [[표트르 1세]]는 농노제를 강화했지만 농노가 공노비로 존재해야 하지 사노비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반대로 폴란드 귀족들은 선거, 의회, 헌법을 통해서 왕권을 무력화했고 그 결과 동시대 유럽에서 가장 악랄한 농노제가 정착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폴란드의 농노제는 러시아의 귀족들 역시 폴란드를 따라 전제정을 무너뜨리거나 제한하여 억압적인 농노제를 만들고자 하는 주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 농노제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것은 당대에 [[혼란 시대]]라는 또다른 암흑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키예프 루스나 노브고로드의 민회를 반례로 들지만 농민의 지주에 대한 경제적 종속화가 심화될 때 그 민회는 귀족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실제로 노브고로드의 경우 무역로가 막혀 상인이 몰락하고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아 농민이 몰락했고 토지가 귀족들과 수도원에 저당잡히고 점차 귀족 공화정으로 변모해갔다.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도 [[예카테리나 여제]]는 귀족 쿠데타로 제위에 올랐고[* 당대 기록을 보면 귀족들은 여제를 대놓고 허수아비 취급했고 여제 역시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귀족들을 거스르는게 불가능했으며 농노제를 개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유럽 국가들의 이러한 착취의 기원을 찾아보면 자연지리적인 요인이 크다.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농업생산량이 낮고, 러시아의 경우 그나마 [[흑토]]지대가 전세계적으로 비옥한 땅이지만 반대로 기후조건이 나쁘고 변화무쌍해서 소련 이전까지는 주기적으로 대기근을 초래했고 부동항을 통해 대규모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것은 키예프 루스의 멸망과 [[혼란 시대]]의 주된 원인이었다.[* 키예프 루스의 분할상속법상 자주 내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몽골 이전에 대기근으로 이미 분열되고 약화된 상태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분열과 내란 자체가 기근으로 먹을게 없다보니 상대방 것을 빼앗으려는 이유에서 일어났다. 혼란 시대의 대기근은 소빙하기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노브고로드의 특정 기간을 예로 들면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공화국에서는 1364년과 1370년에는 기근이, 1352년과 1390년과 1414년에는 전염병이 있었고 1359년과 1384년 1388년에는 반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보야르들은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농민들은 보야르들에게 스스로를 찰아 노예가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계속화되다가 계급투쟁과 반란이 빈번하게 된다. 보야르들은 베체를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고 구심점이 없는 민주정 특성상 전제정보다 더 취약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노보고로드의 경제적 부흥기에선 해소되고 쇠퇴기에선 다시 터지는 식으로 반복되다가 15세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에 병합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작 이반 4세가 베제를 계승한 젬스키 소보르라는 민주적 제도를 도입한 것이 아이러니.[* 이반 4세는 '노브고로드의 베체'를 철폐한 것이지 베체를 계승한 의회적, 민주적 제도들은 오히려 부활시켰다. 물론 이반 4세가 민주주의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보야르들을 견제하기 위해 농민, 상인, 성직자 등의 권한을 증대시킨 것에 가까웠다.] '민주적인' 노브고로드와 폴란드가 '전제적인' 모스크바보다 더 억압적이고 착취적이었다는 사실은 해당 시대에서 억압이니 착취니하는건 민주정이나 전제정, 몽골의 영향과는 상관 없고 인간 능력 밖의 환경적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먹고 살기 힘드니까 귀족은 농민을 착취하려 하고 농민은 귀족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고 국가는 그 둘의 균형을 최대한 맞추려고 강제하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농노제와 전제주의적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다르게 보자면 전제정의 형성은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돌고 돌아서 폴란드든 몽골이든 서구화든 뭐든 간에 이러한 과정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도구였지 아무리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어도 미시적인 부분에 그칠 뿐 거시적인 영향은 미미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폴란드든 몽골이든 러시아에 미친 영향력은 분명 컸지만 필요에 따른 선택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막대하다 한들 중요한 요소는 되지 못하며 결국 몽골 이전과 이후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라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